사색방/58 개띠의 삶

고향산천 시리즈 - 우리 모교

草 雨 2009. 10. 6. 22:44

 

나산서 궁민해꾜

 

 

 다리위에서 바라본 원구산 초입 삼거리

포장도로가 보이니 옛시절 얘기를 아니할 순 없구려

 

냉천동 마을 앞 24번 국도

(당시 입말로 깔쿠막이라고덜 불렀지)

정말로 허벌나게 비탈진 비 포장 신작로 길이었어

차가 지나가면 뒤 따르는 흙 먼지는

화물열차 화구에서 내 뿜는 연기는 쨉도 안 됐지머여

 

나산면 5일장이 파장하고

말이 끄는 달구지(당시엔 구루마라고 했지)들이줄을 지어

함평으로 함평으로 향해 비탈길을 허우적거리면

우리들은 몇몇이 무리지어

힘이 부쳐 주인장에게 회초리로 뒈지게 얻어맞는

 

입에서 개거품을 물고 머리를 치들고

허공에서 도리질 치는 말들이 불쌍해서

누구라고 랄것없이 달구지에 달라붙어 밀어주곤 하였지

 

우리는 그때부터 노동의 댓가를 알았어

어느 말 주인이 눈깔사탕을 많이 주는지 훤히 꽤고 있었거든

*

 *

 길옆으로 나락이 길다랗게 널려있어

상대편에서 오는 차를 피하면서

생긴지는 꽤 되는데 그래도 이질감이 느껴지는 우리 밭옆에 선 십자가 교회당

 

 차라리 폐교상태가 더 괜찮아 보였겠다싶은

지금은 용도가 바뀐 우리의 모교 정문

옆 표석은 일부러 안 찍음

히히히

쬐끔 맘에 걸리긴 한데 ..

*

겨울 방학때면 우리동네 24번 국도는 커다란 자연 썰매장이었어

흔해빠진 대낭구를 ㄷ자 홈을 파서 내발에 맞춘다음

정지 아궁이 불에 앞섭을 구워서 강하고 유선형으로 만든 다음

신작로로 ?떨어지게 뛰었지

 

요즘말로 새로산 자가용이지

생각해봐 얼마나 설레겠어?

그런데 그게말여 수명이 3일을 못가더란 말이시

눈속에 박힌 돌을 훑고 지나가면 땜빵이 안됐어

 

당시에 굵은 철사가 어디있었남?

만만한게 궁민해꾜 유리창 레일이었어

적당한 간격으로 못질 할 구멍도 둟려있고

사각향이라 합판에 잘만 고정해 놓으면 반 영구적으로 탈 수있었지

 

요즘 말하면 노 튜브 스포츠카를 새로 구입하는거지

모든이의 선망의 대상이며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

문제는 그 뒤 였어

한놈이 뜯어가기 시작한 유리창 레일이한 겨울이 나면

손이 닿는 창문의 반쪽은 다 없어지는거여

다음은 상상에 맞기겠네

사진에는 그 건물이 없구먼

 

지금에 와서 이실직고 하고나니께 속 시원하구먼

뭐 어띠여?? 학교도 없어지고 소멸시효도 한참 지났는디...

*

 저멀리 우리 동창들이 세웠다는 순신어른 애기동상이 보이고

나머지 건물은 헐린체 2층 슬래브건물만이 채색하여 새단장한게 낯설어보이는군.

 

 궁민핵꾜 뒷마을이 조산이었지?

구산들어가다 좌측 우리들이 미술시간에 올라 숨바꼭질하고

몽당 크레파스로 그림그리던 그 뒷동산 밑에 있는 마을

뒷동산과 몽당 크레용이란 내용의 글귀가 어딘가 있을겨.

다음에 찾아서 올림세

 

 멀리 아랫 당산 뒷 마을 전경

벼 색갈을 가능한 누렇게 보일려고 했더니 색깔이 오바한 듯~~

 

 

 원형 주추에 열개의 원주

 초익공 겹처마  

삼칸 겹집의 팔작지붕 장 사각 모정

 

그시절엔 그리도 커 보이던 당산나무가 왜소해 보이고

민속 대명절인데

나와서 노니는 이 어린아이 두어명 뿐

스산한 느낌마져 감도는 당산 모정

 

 좌측으로 아마 우리 동창 M.G가 살았던 집 근처

무성한건 여기도 죽림뿐인듯

그 가운데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느티나무가 욕심나는 군

돌아서 올라가면 내동마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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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곳에서 공부했던곳 참 감회가 새롭다 그래도 그 어린 마음에서는 대단한 학굔데 선생님이 우러러 보이고 6년을 갈고 닦은 우리의 배움의 터전이다 꼼꼼함이 엿 보인다 배불띠기 ㅎㅎㅎ 09.10.09 22:44
그래 맞다..방학때도 학교 도서관에 동화책을 읽고싶어 둘째형님 친구였던 당시 소사였던 문향래 셩님 졸라서 해가 뉘엿 뉘엿 질때까지 책을 읽었던 기억..내 인성의 기초를 잡아주던 모교였지..허나 그 다음 중핵꾜가 문제였다..왜냐구?? 새로울것도 없지만 392번을 다시 읽어보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