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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공무원도 '무서운 퇴직'…한창때 은퇴설계

草 雨 2011. 9. 20. 11:47

 

고위공무원도 '무서운 퇴직'…한창때 은퇴설계

[은퇴시작한 베이비부머 4인4색<4(끝)>]정부 중앙부처 고위공무원

머니투데이 | 송지유 기자 | 입력 2011.09.20 06:06 | 수정 2011.09.20 08:26 |

[머니투데이 송지유기자][편집자주] '1차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의 은퇴가 시작됐다. 한국전쟁 이후 태어나 산업화 초기 유년기를 보낸 이들. 콩나물시루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소 판 돈으로 대학을 다닌 사람들. 자신의 노후준비보다 부모 봉양과 자녀 뒷바라지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세대. 728만명. 전체 인구의 14.9%에 달하는 이들의 '집단퇴장'은 한국 경제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는 전망이 잇따른다. 2011년 9월 사는 곳, 하는 일이 제각기 다른 '베이비부머' 4인의 현실을 시리즈로 들여다본다.

 

"저도 사람인데 승진 욕심 안난다면 거짓말이죠. 먼저 승진한 동기들 보면 샘도 나지요. 하지만 승진에서 뒤지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빨리 퇴직하는 겁니다. 빨리 올라가면 집에도 빨리 가야 하잖아요. 과거에는 퇴직한 선배들이 산하기관이나 대기업 임원으로 많이 옮겨갔는데 요즘은 갈 곳이 없어요. 나라 일 맡아 했던 사람으로서 아무 일이나 할 수는 없으니 재취업은 더 어렵죠. 그저 아이들 뒷바라지할 때까지 오랫동안 자리를 지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부 중앙부처 고위공무원인 이신우씨(가명·52)는 퇴직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다. 대학시절 함께 행정고시를 준비한 친구들보다 빨리 합격해 부러움을 한몸에 샀지만 지금은 인사시즌마다 승진명단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집에 갈 순서를 헤아리는 처지다.

누가 공무원을 철밥통이라고 했던가. 고위직은 자리가 한정돼 있으니 자리를 이동할 때마다 갈곳이 마땅치 않다. 인사적체로 몇 년째 승진을 못한 후배들의 눈치도 보인다.


하지만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공무원 옷을 벗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 퇴직한 뒤 재취업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중앙부처 고위공무원들은 퇴직한 뒤에도 은행, 공기업, 대기업의 임원·고문 등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씨 선배 중에는 퇴직한 뒤에도 곳곳을 돌며 10년 넘게 일한 사람도 여럿 있다. 이씨는 그들이 정말 부럽고 그 시절이 그립다.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 중앙부처 고위공무원들도 퇴직 후 거취가 확실치 않다. 설사 이씨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더라도 평생 국민세금을 녹으로 먹고 산 공무원으로서 지켜야 할 본분과 명예가 있으니 무턱대고 검증되지 않은 자리에 가기도 어렵다.

초고속으로 고시를 패스해 친구들보다 결혼을 일찍한 그지만 결혼 전인 자녀가 셋이나 있다. 올초 취직한 큰딸(26)과 대학원에 다니는 둘째 딸(24), 군복무중인 아들(22)에겐 학비부터 결혼자금까지 줄줄이 목돈 들어갈 일만 남았다.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하고 비싼 보물들'이라는 이씨의 입버릇대로 자녀 3명 모두 짝을 찾아 품에서 떠나보내려면 앞으로도 치러야 할 비용이 만만치 않다.

 

공무원 생활 26년. 4억5000만원짜리 경기 고양시 126㎡ 아파트와 예·적금 6000만원, 2년 전부터 매달 50만원을 붓고 있는 연금저축이 그의 재산의 전부다.


주변에 아파트나 상가, 오피스텔 등에 투자해 꽤 큰 돈을 번 지인들도 있지만 이씨는 투자공무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부동산 투자는 꿈도 못 꿨다. 외벌이 공무원 월급으로 자녀 셋을 키우느라 그 흔한 보험 하나 가입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씨에겐 공무원 연금이 있다는 것이다. 퇴직시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씨는 매달 270만원 안팎의 연금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부모 봉양이나 자녀 뒷바라지를 마친 부부가 생활하기엔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결혼을 앞둔 20대 초·중반 자녀가 셋인 이씨는 사정이 다르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이씨의 부인(50)은 요즘 방송통신대학교 유아교육 과정을 이수중이다. 이씨가 퇴직한 뒤 새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을 때에 대비해 놀이방 창업을 준비하는 것이다. 유치원 보육교사였던 처제와 함께 집 근처에서 놀이방사업을 하겠다는 게 부인의 계획이다.

공무원인 남편에게 누가 되지 않는 일을 찾아보겠다며 몇년을 벼르고 별러 진행하는 일이니 최대한 지원하고 싶다.

"아직 한창 나이인데 퇴직을 걱정하는 현실이 속상하죠. 퇴직 후 적당한 일자리가 생긴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욕심은 내지 않으려고요. 세상 모든 갈등은 사소한 욕심에서 시작되니까요. 정 안되면 부인이 하는 놀이방 일 도우면서 봉사활동 다니려고요." 2011년 9월 이씨의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