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방/58 개띠의 삶

그시절의 팔월 한가위

草 雨 2009. 10. 1. 21:20

 

 

123

 

 

팔월 한가위

 

 

매년 이때쯤이면 선들바람이 솔솔 불고 조석으로 옷깃을 여밀때 

어딘지 따스하고 포근한 곳이 그리워지는

허한 중년의 가슴 한구석이 채워지기를 기대하면서

 다시금 나라는 존재를 되돌아 보게 된다.

*

*

나의 유년의 한구절

*

*

팔월 대명절을 한달 전부터 손가락으로 헤아리며

울 엄니가 이번 명절에 무슨 옷을 사주실까?

아니 또 걍 넘어가겠지..

새 양말이나 고무신정도는 사주시지 않을까?

그것도 안 사주시면 학교애들한테 너무 창피할텐데....

 

허나

지금에 와 부모되어

울 아부이 엄니의 그때의 심정을 헤아려보면

굶주린 자식들에게 때때옷한벌 사주지 못한 심정은 오죽하셨을까?

아무리 논 밭을 파헤쳐 봐야

돈이 되는게 없고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궁핍한 생활을 이끌어가는

가장의 심정이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직하다.

 

허지만 배고푸고 어린 이네 마음은 그 부모의 심사를 알턱이 없었으니....

 


손가락을 접어가며 기다리던 팔월 한가위의 기대는

날밤이 지나면서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마지막으로

어린나이에 객지에 직공생활하는 형들을 기대게 된다.

 

그들 역시 어린나이에 부모곁을 떠나

고달픈 타관객지에서 그리운 고향산천을 그리며

아끼고 아낀 삼짓돈으로 선물 보따리를 매고 달려올때가 되면 

철없던 막내인 나는

아침녁부터 동구밖 신작로길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버스를 눈에서 놓치 않았다.

 

마을 앞을 그냥 지나치는 만원 버스를 볼때마다 실망과 기대가 반복되고

다음 차를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 굴렁쇠를 굴리며 논둑길을 지쳤다.

 

어쩌다 버스가 멈출라치면 이웃 형님이나 누이,고모가 내리곤 했다.

그의 동생들이 참새처럼 조잘되며 신작로로 줄달음치면

나는 또 굴렁쇠를 굴렸다.

손재주가 부럽도록 좋으신 아부이는 어디서 일등품의 굴렁쇠를 구해오셔서

나의 유년시절이 다가도록 쌩쌩하였던 그 굴렁쇠였지만

 

한양서 온 형들이 준 5원짜리 지페들 든

동네애들은 국민핵교 전빵으로 달려가 눈깔사탕을 입에 물고 목청껏 소리내며

마을어귀를 돌아올때면 나는 우리 누렁이(똥개)를 쓰다듬으며

"치~~ 별것도 아닌 사탕하나 물고 지랄들이야"

"니네들은 형이 하나지만 난 두명이나 온다"하며 맘을 달랬었다.

올지 안올지 모르는 기약없는 형님들이었지만....

 

 

그러나 어쩔 수없이

기가 꺽인 나는 돌팎을 걷어차며 다시 나도 모르게 다른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나보다 19년 위인 큰 형은 나에겐 아버지같은 존재였다.

빈손으로 버스에서 내려도 나는 큰 형이 자랑스럽고 어렵고 한편 무서워했다.

 

텅빈 신작로길옆 버드나무가 석양노을에

붓솔을 거꾸로 세운것처럼 길게 그림자를 드리울때

 

자포자기의 내 심정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무심한 아버지는 소꼴을 베어오라고 명령을 내리셨다.

 

형님들이 오시면

꼴을 많이 준비해둬야 몇일 놀아도 소 먹이가 여유롭기 위한

준비성 많으신 아부이의 사례깊은 마음을 나는 알 턱이 없었다.

 

 

내일 모래가 팔월인데 

아부이는 왜 조기굽고 송편만들고 하시지

애꿋은 소에게 소리지르며 비탈 뒷밭을 갈아 엎고 계실까?

 

아부이 당신인들

객지에서 일,이년만에 돌아오는 어린 자식이 얼마나 보고싶었으랴만

 

철이 다든 맏아들이 논밭을 돌아볼때 흉작인 콩밭을 보여주기 싫어서

빨리 갈아엎어놔야 했기에 맘만 바쁘셨을 그 조바심을 알기에는 많은 세월이 흘러서였다.

허나 그때는 내게만 화풀이 하는 당신을 야속해만 했으니....

 

그렇게 추석 전전날의 해가 넘어갈쯤

 

나는 나보다 더 큰 쑤셔넣기도 힘들만큼 욕심스럽게 한 짐의 풀을 지게에 지고

사릿문을 작대기로 재끼면서

아부이테 칭찬을 받고싶어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는 사릿문을 주춤대며 들어가 

마당 한 구탱이에 널부러뜨렸다.

 

그런데 아부이 입에서는 칭찬대신 불호령이 떨어졌다.

들녁 논두렁을 손바닦보듯 아시는 아부이가 그토록 성긴 삐비풀을 어디서 베어왔는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으셨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누구네 할것없이 소 한마리가 그 집안의 부를 가름할 척도였으니

풀 한포기 갖고도 삿대질이 오고 갈정도로 싱그런 들풀이 귀해 산으로 오르는 판국이었으니

남이 비료와 퇴비주면서 애써 기른 풀을 몰래 훔쳐 베어왔으니

아부이의 불호령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부이의 회초리를 달게 맞으면서도 끝내 되돌려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존심하나로 살으시는 아부이가

 꼴을 다시 지게에 지고 갖다 준다는 것은 가히 상상도 못할 일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종아리를 안 맞으려 뒤안으로 도망가면서도 속으로 흐믓하게 웃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것은 형님들 오실때까지 아부이는 그 풀들을 아꼈다가 

형님들이 주시는 것을 지긋이 지켜보는 것을 나는 보았다.....

 

    

들녁에서 팥이며 돈부 파뿌리를 바구니에 이고

지쳐 돌아오신 엄니는

 

저녁준비를 안 했다며 부엌빗자루를 들고 정지바닦을 후갈기며

오동딸인 누이를 타박하시며

불이 잘 들지 않은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빠른 손놀림으로 저녁을 지으셨다.

 

엄니의 유일한 휴식시간인 아궁이 불때기

 

노래인지 신세타령인지 모를 흥얼림을 하시면서 부지갱이로 장단을 마주쳤다.

손바닦만한 부엌방에서 나는 두다리를 벼랑박에 거꾸로 세우고 드리누운체 

제목도 모르는 엄니의 18번을 앞질러 목청껏 불러드렸다.

 

시들 시들 봄배추는~~

비가 않와 말라들고~~

*

*

그러면

엄니는 막내인 내가 귀여우셨는지 곧잘 웃으시고는

어느 정도 시름이 달래지셨는지 

 

"에고 우리 쇠아치(암소) 오늘도 고생많이 했다"하시며

소 꼴을 삶기위해 아궁이를 옮겨 앉으셨다.

 

우리 엄니는 나보다 소새끼를 더 이뻐하신 주 알고 엄니가 않계실라치면

부지갱이로 쇠아치 엉덩이를 갈기곤 했었다.

 

아부이,엄니의 가장 믿음직한 일꾼이자 재산 밑천이었던 그 누렁소를.....  

 

 

빠알간 고추에 된장을 발라 맛나게 저녁을 채우고

호롱불밑에서 코구멍을 태우다 한참 잠이 들었을까

 

갑자기 동네 어귀부터 똥개들이 우리집쪽으로 가까이 오면서 교대로 짓어댔던것 같다. 

엄니는 그때까지 주무시지도 않으신 듯

맨발로 마루에서 마당으로 뛰내려가 사릿문을 밀어재끼시면서

울음 반 웃음 반 울먹이면서

"에고 내새끼들 오느라 얼마나 고생혔냐"면서 통곡을 하셨다.

 

차도 못 타고 밤새 달빛을 등에 얹은체 향교와 잿골을 넘으며

행여 선물보따리가 부서질까 땀으로 범벅이된 장형과 둘째형은

 

서름과 기쁨으로 함께 얼싸안으며 닭똥같은 눈물로 인사를 대신할때

아부이는 안방문을 열어놓고 아랫목에 앉아 봉초담배에 연신 불을 지피시며

밤공기가 차니 어여 들어오라 재촉하셨다.

 

내가 국민핵교 6학년때 새로 집을 지었으니까

그때만도 곧 쓰러져가는 오두막집이었으니 대문인들 제대로 서 있을리 없었고

그날이 우리집 사릿문이 넘어지는 날이기도 했으니

 

엄니의 자식 그리움이 얼마나 사뭇쳤는지

지금에 와 생각하면 그 헤아림이 넘치고 남는 듯하다.

 

 

아부이는 자식이 어떻게 차를 타고 왔으며

어디서 부터 걸어왔는지 형들한테 들으시면 한편의 드라마인냥 

골연초 담배를 연신 붙이시면서 한숨하닌 한탄을 하셨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이보다 더 애통하고 가슴애린 부모심정을 그 어디서 헤아려 본단 말인가??

 

부엌방에서 앞이 어두우신 할머니 손을 잡고 나는 어찌 할바를 모르고 있는사이

정 많고 자상하신 둘째 형님은 우리 막둥이 어디있냐고 하시며

나의 기대 몇배의 선물을 내 품에 안겨주셨다.

 

( 지금은 저승에 계시는 나와 띠 동갑이신 누이같은 둘째형님 ) 

( 지병이 벼랑 끝에 왔을때까지 기운 없는 팔로 정원을 가꾸시던 )  

( 여름인데도 차겁디 차거운 형님의 앙상한 손등이 눈에 드리워져 가시지 않는다.) 

 

나는 새옷 보따리를 두팔로 안은체

안방에서 형님들과 아부이가 밤새도록 오가는 얘기를 들으며

아침아 빨리 와라소리치며

대낮같이 휘엉찬 마당을 뛰다니며 밤을 새웠다. 

 

 

아부이는 어떻게 벌어서 쇠아치 살 돈을 부쳤냐고 물으시면서

년말쯤이면 새끼를 낳을 것이다라고 자랑스레 형들앞에 말하셨다.

(회상컨데 그겨울 너무 추워서 대나무가 눈덩이에 못이겨 휘어지고 )

( 송아지는 추위에 얼어 죽은걸로 기억하며 이 소식을 들은 형님들이 그 이듬해인가 )

( 시골집을 새로 짓는 계기가 되었지 않나 추측해본다. )

 

새벽 소 여물을 주러 문을 열고 나가시면서

누구자식은 이쁜 새악씨도 같이 오더라고 들리는 둥 마는 둥 뇌아리셨다.

*

*

나는 그때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나도 형들따라 서울가서 돈 많이 벌어다 아부이께 드려야지.)

( 나는 하춘화보다 이쁘고 노래잘하는 각씨 데려와서 ) 

 ( 울 엄니테 노래 많이 불러 들여야지...)

*

*

*

        
*

*

나열하자면 실타레처럼 풀려나오는 춥고 배고팠던 나의 유년시절이

어디 꼭 나한테만 국한 되리오

우리네 서글픈 58년 개띠의 유년시절은

다들

허기진 배 한번 채울때가 추석 명절이었으니

그 시절 순박하고 욕심없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지상명제로만 알았던 우리네 유년시절을

삶에 무게에 짓툴려 한 동안 망각한 체 현실에 눈박고 지나지 않나 싶어 회상해본다

어버이 여의고 삼년이 지나야 후회한다더니

홀로 계시는 엄니가 더 가여우셔라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하여라!! 



제 블로그를 찾아주신 벗님이시어 !!

올 추석은 가슴이 더욱 풍요로운 명절이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위 자료들은 이미지일 뿐이며 빌려주신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

 

 

 

가려는데 전원의 풀내음님이 잡으시네요 사모곡에 눈시울이 ...풀내음님! 반갑구요 처음 뵙습니다 자주오세요...가슴이 더욱 풍성한 한가위 되시구요 ^^ 09.09.29 23:31
 
 
명절이 돌아오면 여인네들 심정은 이런 사모곡처럼 아프옵니다. 이러 저러 챙겨야 할 것들,,,해야 할 것들,,,그리고 그 후,,, 끙끙~ 며칠 아파야 할 후유증까지요. 제 얘기냐구요? 아니어요~ㅎ 저는 한강다리만 건너면 시댁이고,,,맏며느리라 하여도 시어머님이 워낙 개방적인데다 여존남비사상이 강한지라 <--- 돌 날아올라요. ㅎ 09.09.30 09:56
근데요, 전원의 풀내음님께옵서 가져 가시기만 하셨는지 전혀 몰랐읍니다. 그.럴.수.가.요.!!!!! 하지만 이렇게 게시물로 자수하여 주시니 말끔히 용서해 드립지요~ㅎㅎ 자주 뵐 수 있었음,,,,,,,,싶습니다.^^ 09.09.30 09:57
 
사모곡 ... 너무 좋네요~~꾸뻑 09.10.01 12:18
 
 
나이가 들어 나도 부모되어보니 그 심정을 알겠는데,,그래도 그 시절의 그마음만 하오리까??..감사히 듣고 갑니다.. 09.10.06 12:11
 
 
이승에 안계신 어머님 넘 보고프게 하는 노래내요 고맙습니다 09.10.07 17:35
 
 
좋은 글 젬나게 잘 읽고 , 어린시절의이야기가 마음의 와 닫내요, 사모곡 노래도 잘듣고요 감사 해요, 09.10.11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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