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가고 오는데/사색의 시간

시 한편을 더 써야지 (시인. 고은)

草 雨 2011. 8. 24. 12:40

만일 내일 죽는다면

 

 

 

생은 느긋하지 않으나 여생이란 느긋해야 할 터.

나는 아직 느긋할 줄 모른다

 

처서(處暑) 뒤이므로 아침 저녁 옷깃 언저리가 서늘하다.

한낮의 빨래들도 따가운 햇살을 받아 아이들처럼 좋아라 하며

건들바람 한 자락에도 앞장서서 펄럭인다.

 

삶은 계획이나 디자인이 아니다.

피조물 신세로 누가 시키는대로가 아니다.

그것은 끝내 불가사의한 것.

삶을 두고 완성이라는 뜻도 한갓 수사일 뿐 그것은 이세상에서 불가능하다

삶의 임기 안에 맡은 바를 다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가.

 

누구에게나 삶은 미완이기 십상이다.

사실이 이런 바에도

인간 애착의 길이란 무엇인가를 하고 무엇인가를 남기는 길이다.

 

아무리 삶의 역정이 덧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 생활의 행위는

들짐승이나 새나 풀들의 무위를 그대로 따르지 못한다.

 

나는 남아있는 삶을 알뜰살뜰히 설정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나 자신에 대한 무의식으로 살고 있다.

미래란 내가 살아있을 때나 죽은 뒤에나 나의 것이 아니다.

 

자, 내가 내일 죽는다면 오늘 할 일이란 무엇인가.

사과나무 대신 모과나무를 심을까.

아내에게,그리고 친구에게 편지를 써놓을까.

 

그냥 말 수 없겠지.

시 한 편은 써 놓아야 하겠지.

이제야 깨닫게된 것.

그것이 바로 시와 죽음의 본질적 일치 아니겠는가.

 

보라. 삶의 끄트머리에서 시는 죽지 않고

시대신 내가 화살 맞아 죽을 것이다

 

- 2011년 8월 24일 동아일보 기고문 중에서 -

 

노벨 문학상 후보 시인. 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