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방/58 개띠의 삶

고향이란 것이...

草 雨 2010. 9. 8. 17:11

 

기억속의 팔월 한가위

 

 

내가 어릴적엔 한가위란 낱말은 알지 못했다.

팔월은 곧 추석이고 추석은 곧 팔월이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두 손가락을 접어가며 그날을 기다렸다.

그날은 맛있는 닭고기와 송편을 먹을 수있고

어쩌나 운이 좋으면 새옷과 새 양말과 새 고무신을 갖어볼 수도 있는

기회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팔월이 몇일 앞으로 다가오면 마을앞 공동 우물터가 북적이기 시작했다

그곳은 마을 일간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누구 자식은 바빠서 못 온다느니

누구아들은 이쁜 색씨를 데리고 온다느니

 

서울에서 형제나 삼촌이나 고모가 내려온다는 것은

시골에서 보지못했던 맛있는 사탕과 새옷이 더불어 올 터이기에

자기네 형이 못 온다는 소식은 곧

우리네 어린 것들은 허탈과 실망으로 연결되어졌으니

-- 짚 두대가 마주보고 있는 곳이 우물터 --

 

추석하면 바로 연상되는 것이

마을 앞 거북네 산 꼭데기에 있는 넓다란 천연잔디가 있는 무덤터에서

모처럼 들뜨고 시끄럽고 울긋불긋 이쁜 옷을 입은

형 누나들이 들녁을 다닐때는 동네가 활기차고 들썩거렸다

나이도 성별도 상관없이

서울에서 내려온 형 누나들이 모여서 손 야구를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화루"라고 했던 것같다

 

서울에서 온 누구는 화루를 못해도 이뻐보이고

시골에서 묵은 언 형은 화루를 잘 해도 미워보였다.

 

그렇듯 어린시절 고향 마을은

밤이면 약속이 없이도 어느집 사랑방에서

지금처럼 노래방시설도 없었지만 손벽으로 장단맞추며

노래소리가 마을을 휘감았고

이를 구경하려는 어르신네들이 하나 둘 모일락치면

사랑방에서 마당으로 나와 한바탕 굿거리장단이 이루어지곤 했다

여름내내 천수답에 물대느라 김매느라 지친 어르신들의 유일한 휴식공간이던 우산각도

팔월에 내려오는 자식들을 위해

주위의 풀을 뽑아 말려서 모기불을 놓을 수있게 준비해 주셨다.

 

-- 왼쪽에 커다란 나무있는 곳 중앙에 우산각이 있다 --


자치기 고무줄뛰기 화루놀이 구슬치기했던

그 시절의 형 누나 칭구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그렇게도 즐겁게 놀았던 우산각이 지금은

바가지하나 엎어 놓은 듯 보잘것없고 초라한체 내려 앉고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유일한 놀이터이던 두 그루의 당산 나무이자

100일동안 보랏빛 꽃을 선사하던

몇놈이 올라가 놀아도 끄덕없던 배롱나무도

언젠가 베어진 체 지금은 자라다가 지친 1미터 남짓의 새싹만 보인다.

 

집집마다 개인 우물터가 생긴 후

그 유명하던 냉천우물터는 흉물처럼 홀대받으며 함석뚜껑에 쒸운체 팽개쳐 있다.

 

여름내내 물장구치고 송아지 목욕시몄던 거울같이 맑던 냇가는

이름모를 잡풀도 뒤엉켜 사람의 접근을 거부한체 웅덩이도 보이지 않는다

 

우물터에서 쪼그리고 앉아 빨래하던 삼순이와

냇가에서 가재잡고 미역감던 여춘이는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

 

형님들이 보내주신 돈으로 산 송아지는

젖통이 털렁한 누렁이 암소가 되었고

잘키운 아부이는 장형에게 소 잔등을 쓸어주시며 "곧 산기가 있을거여" 하셨다.

 

성들이 피땀흘려 보내주신 공책을 이렇게 써서 되겠느냐며

글씨를 못 쓴다고 고무필통을 작두에 싹뚝 잘라 버리시며

"손가락으로 글을 쓰는게 낫겠다"며 한문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셨던

자존심강한 울 아부이가 그 곳 고향에는 항상 계실 줄 알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줄곳 급장을 하는 막둥이가 대견스러워

객지의 형님들에게 보낸 편지에 "쓸만한 필통하나 사다줘라"하셨단다

팔월이 지난 후 나는 젯트킹(?) 로고가 새겨진 빨간 자석 필통을 가질 수 있었다

 

-- 구옥은 헐린체 타 용도로 사용중인 모교 --


유난히도 막내 사랑이 지극하셨던

한문을 가르치실때는 목소리가 쩌렁쩌렁하여 작은 동네가 들썩거렸던

울 아부이는 지금 그 곳에 아니 계신다.

 

빨래하던 삼순이도 꼴을 베던 여춘이도 이제는 백발이 되었거나

더러는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빈집이 늘다가 허물어져 텃밭이 되고

지팡이와 유모차를 지탱하며 걷는것마져 고역스러워

안녕하시냐는 인사도 드리기가 민망한 어르신 몇분만 그 곳에 계신다

 

이번 태풍에 뒷뜰 대나무가 휘어져 지붕을 덮쳤다는

무릎이 아프신 구십의 모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있다.

 

만날 사람도 눈요기도 없는 보잘것없는 그 곳

갈적에도 못갈적에도 가슴 한구석이 멍멍한 그 곳

그래도 그곳이 내 고향이다.

이젠 먹고살만하여 뭔가 자식 도리를 하려는데

울 아부이는 몇해전 세상을 버리셨다.

임종하시기 전 그 토록 나를 찾으셨다는데 불효 막둥이가 된 것이다.

 

나는 알 것 같다

울 아부이가 왜 그토록 나를 보고싶어 하셨는지를 
그 분이 가실 묘자리가 걱정되어서 였음을 ...


해가 바뀔수록 아부이에 대한 죄스러움이 북받쳐 오른다

남달리 막내 사랑이 지극하셨던 그분이 그곳에 계신다.

 

나는 지금도 그분의 힘으로 살아간다
날이 갈수록 새록 새록 고향의 어린시절이 울 아부이와 점철되어

겹치고 겹쳐도 선명하게 잘도 보인다

 

어린적이나 지금이나 팔월의 나의 고향은 그런 곳이다 

 

-- 왼쪽 아래 파란 기와 --

-- (사진 모두 2009년 한가위때 것임을 양해바랍니다.) -- 

 

 

 

-- 방문하여 주신 모든 분들께--

-- 풍요롭고 넉넉한 한가위 맞으시길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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